57화. 2023년 마지막 날

57화. 2023년 마지막 날
열두 시가 가까워지자 TV 화면이 바뀌었다. 어딘가의 광장, 불꽃, 사람들의 함성. 타종 소리가 거실 안으로 흘러들었다. 아이는 그 소리에 별 반응이 없었다. 누나 옆에서 블록을 쌓고 있었다. 빨간 것 위에 파란 것, 파란 것 위에 노란 것. 묵묵히, 집중해서. 거실의 새해맞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.
나는 소파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. 아내는 주방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. 누나는 아이 옆에서 자기 블록을 쌓다가 아이 것이 무너질 것 같으면 살짝 받쳐주었다. 말없이. 그게 누나의 방식이었다. 2023년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흘렀다.
한 해를 돌아봤다. 봄에는 호랑이 놀이를 했다. 아이가 처음으로 역할놀이에 응했던 날, 나는 네 발로 기며 으르렁거렸다. 우스운 아빠였다. 여름에는 수술이 있었다. 아이가 전신마취를 받던 날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며 나는 의사이면서 아버지였다.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꽤 오래 흔들렸다. 가을에는 버스를 탔다. 시내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아이가 중얼중얼 무언가를 읊었다.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즐거워 보였다. 그룹 수업에서는 선생님이 처음으로 아이를 칭찬했다. "오늘 친구 이름을 불렀어요." 그 말 한마디를 아내와 나는 저녁 식탁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다.
숫자로 정리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. 언어 발화 횟수, 눈 맞춤 빈도, 치료 회차. 그런 것들을 나는 직업상 늘 기록하지만, 정작 2023년을 만든 건 그 숫자들이 아니었다. 화장실에서 처음으로 혼자 물을 내리던 날의 표정. 새벽에 열이 나서 나를 부른 첫 마디. 누나가 웃으면 따라 웃던 그 찰나. 이런 것들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지만, 이 하루들이 모여 이 아이를 만들었다.
타종 소리가 울렸다. 새해가 왔다. 아이는 블록을 하나 더 올렸다. 무너지지 않았다. 누나가 박수를 쳤다. 아이가 누나를 봤다. 잠깐이지만, 분명히 봤다.
2023년, 잘 가라. 쉽지 않았지만 좋은 해였다. 내년에도 우리 넷이 함께, 이렇게.
댓글 0
첫 댓글을 남겨보세요.